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02

toMySon|2016. 5. 29. 18:20

지난 편지 겸손한 맘으로 잘 읽어 주어 고맙기만 하구나! 아버지 마음을 이해해주는 아들이 너무너무 고맙다! 이번 편지 역시 너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작은 바램으로 글을 쓰고 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 사춘기 무렵 부모의 잔소리로만 듣지 않길 작게 나마 소망해 본다!


아빠가 늘 이야기 하는 것이지만, 정보는 그냥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늘 생각하고 고민하여 가려서 내것으로 소화시켜 받아들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정보를 입력 받는 기계 - 사람들은 이것을 데이터 베이스라 부르던데 - 와 다름이 없지. 넌 기계가 아니라 사람이다. 신학교에서 배우는 모든 것과 아빠의 편지도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 이라는 필터로 거르고, 너의 비판적 사고로 고민하여 너의 내면으로 화하거라





각설 하고, 우리 몸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니?  아니 도대체 '성전'이 무엇이라 생각하니?


너도 잘 알다시피 성경은 우리 몸이 성전이라고 말한다(고전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데 오늘 날 수많은 목회자들은 언젠가 부터 - 한 80년대 인 듯하다 - 성전이라는 말을 사람 몸이 아닌 건물에 쓰기 시작하더구나.

나는 이것을 매우 통탄할 일이라 생각한다. 성전이 건물로 둔갑한 후로는 성도들의 신앙이 철저히 망가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성도들은 자기 자신 안에 있는 성전을 가꾸기 보다는 눈에 보이는 건물 가꾸는데 정신이 나가 있더구나.(벧전 3:3-4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그러나 성도들을 탓하고 싶지는 않다. 누가 그렇게 가르쳤느냐를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다.(마 23: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왜 그럼 그들은 말씀을 엉뚱하게 가르치는 걸까? 


예전에 아빠가 했던 말 기억하니? 사람은 누구나 끔찍하게 자기를 사랑한단다. 아빠는 예수 믿고 20년이 지났어도 하나도 바뀐 것이 없는 내 모습을 보면서 내 가 잘 못 믿고 있구나, 내 만족을 위해 믿고 있구나를 철저히 깨달았단다. 예수 믿고, 모든 것이 바뀐 줄 알 았건만, 여전히 죄성이 가득하고, 욕심에, 사람, 물건을 보는 기준도 하나도 바뀌지 않고, 날마다 내 안에 괴물처럼 차고 넘치는 내 모습을 그때부터 보게되었다. - 예수님으로 충만하다 생각했건만 예수님은 없더구나. 예수 있는 척 연기하는 내 모습만 있었지. 그래서 바울도 날마다(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노력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서 예수님도 날마다(눅 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강조하셨는지 모르겠다.

목회자라고 다를 것은 없다. 목회자들도 여전히 자기 만족과 자기 유익이 선악과 처럼 내 가슴을 뛰게 하고, 매우 보기 좋으며, 나를 만족시킬 만한 탐스러운 것이지(창 3:6상,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요일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가슴 아프게도 아빠는 마치 천주교에서 500년도 더 전에 그랬듯이 눈에 보이는 업적을 위해 달리는 오늘 날의 목회자들을 본다.  푯대(빌 3: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 그리고 복음에 관한 것이 되어야 하는데, 요즘 목회의 푯대는 오직 건축, 인원, 부에 있는 것 같다. 500년전의 그 모습 그대로


건물을 짓는 것...


그게 그렇게 중요할까? 물론 중요하다 내 안의 성전을 짓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런데 이 것은 간과되고, 오로지 눈에 보이는 건물, 그것은 전혀 중요하지 않은 그 건물에 왜 그렇게 목수믈 거는지... 


너도 알다시피, 예수님은 들판에서 복음을 전하셨고, 바닷가에서 복음을 전하셨다.  작은 회당에서 두루마리를 펴셨다.


그런데 현대 대형 교회들의 크고 화려한 건물들, 또 건물을 짓기 위해 성도들의 눈을가리고 교회 건물을 성전이라 부르는 행태들을 예수님이 보시면 무어라 하실까? 


좀더 비약하면 건물이 성전으로 둔갑했기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건물안으로 들어오면 거룩하게 살지만, 건물 밖으로 나가면 하나님과 관계 없는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내 자신이 성전이라고 끊임없이 배운다면 (교회)건물 안에 있던 밖에 있던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기 때문에(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그 신인식으로 인해  내 맘대로 살고 싶어도 살수 없게 되는 것인데, 목회자들이 자신의 욕심과 만족을위해 - 그들은 이것을 성공한 목회라고 부르더구나 - 성도들을 배나 지옥 자식 만들고 있다는 것을 왜 모를까...


한 샘에서 다른 물이 나올수 없지마는(약 3:11,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복음에 이러한 다른 이야기들을 덧대고 덧대어 마치 복음인양 가르치는 설교가 얼마나 많은지, 한 번은 다른 동역자의 설교를 들었는데 설교 내용이 '일만시간의 법칙'을 힘주어 강조하는데, 요컨데 기도를 헌신을 일만시간을 하면 하나님과 통하게 된 다는 내용이었는데, 성경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라 문제다. 그런데 모든 청중이 큰 소리로 '아멘'을 외치는데 얼굴이 빨걔져서 혼났다.


우리가 뭘 해야 은혜 받을 수 있고, 우리가 뭘해서 하나님께 인정 받자 인데, 이것을 행위주의 율법 신앙이라 부른다는 것을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이 언제 우리의 행위로 우리를 받아주시고 말고를 결정하셨는지 도무지 알수가 없다. 하나님이 언제 부터 우리의 모습을 보고 우리를 인정해주셨는지 궁금하기만 하구나.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하시고, 축복하시는 것이지 그분에게 구원 받고 축복 받는 것은 전혀 우리의 행위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성경이 보증하는 바이다.(롬 4:1-5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된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뇨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이것이 저에게 의로 여기신 바 되었느니라 /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우리가 알고 있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도 우리는 그의 행위에 먼저 초점을 맞추곤 하는데 이름을 다시 보거라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절대 '행위의 조상 아브라함'이 아니다.


행위신앙으로부터 가만히 들어온 거짓 복음은, 성전건축, 십일조, 주일 성수, 성직 등이 있다. 오해가 생길까봐 더 먼저 설명하면, 성전은 위에서 설명하였듯, 건물이 아니고, 우리 모두(몸)가 성전이며,
십일조는 십분의 일만 드리는 것이 아니라 다 드리는 것이며(대표성의 원리를 기억해라),
주일만 주의 날이 아니라 일주일 내내가 주의 날이며(역시 대표성의 원리),
목회자만 성직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제사장(만민 제사장) 이라는 사실이다. 
이상 위에서 열거한 내용들은 다음 편지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 하도록 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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